예배/말씀

(6/7수요예배)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랑이파파 2023. 6. 7.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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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수요예배)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박정우 목사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8:1-11)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히면 구약의 율법으로는 즉결 처벌이었다.

간음한 남자는 어디 간데없고 여인만 예수님 앞으로 끌려왔다.

즉결 처분 당하지 않고 예수님 앞으로 끌려온 것만으로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끌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사람에게 잡히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 잡혀야 합니다.

여인과 같이 죄를 지어도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면 죽을 생명도 살릴 수 있다.

예수님 앞으로 이끌려 나올 때 우리는 여전히 나에게는 기회가 있구나 여기고 붙잡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하여도 예수 앞에 나아오면 된다.

쓰러져도 예수님께로, 넘어져도 교회로,

엎어져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로 나아온다면 소망이 있게 되는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예수 앞으로 나아오면 소망이 있다

여전히 나에게 기회가 있다.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서 이를 붙잡아야 합니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8:5)

모세의 율법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였는데 이는 함정 질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모세의 율법을 다르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와 다른 말을 하게 된다면 모세 율법에 위배됨으로 유대 사회 사람들이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을 따르게 되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평소의 가르침이 무색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음모로 예수님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자신만의 정답을 정해놓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 아니오로 정답만 말씀해 주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답을 듣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실망하기도 한다.

하나님께는 정답보다 더 큰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정답만을 보여주시기 않으실까?

멀리 보여주시지 않고 바로 한 걸음까지만 보여주시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게 하신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에는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걸음 한걸음 순종하며 따라오며 뒤를 돌아볼 때 그 길이 정답이 되는 것이다.

진리를 두고 싸울 때 이기는 사람은 성질이 센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다.

이는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소리 가 크고 센 사람이 이긴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기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할 때

예수님께서는 시선을 땅으로 향한 채 몸을 굽혀

땅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셨다.

시선이 여인에게서 예수님에게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나뭇가지 나 돌멩이로 쓰신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쓰셨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율법을 만 드신 하나님의 손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나는 장면 -

(1)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31:18)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 돌판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친히 쓰신 것으로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2) 벨사살왕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가락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단5:5)

벨사살 왕에게 그의 잘못을 심판하는 말씀을 친히 손가락으로 표현하셨다.

(3) 간음한 여인 앞에 땅바닥에 글을 쓰신 예수님의 손가락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8:6)

여기서 예수님의 손가락은 심판의 손가락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고자 하는 그 분의 손짓이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손에는 정죄와 심판의 돌멩이가 쥐어져있어서

언제든지 돌을 던질 태세로 나아왔지만

우리의 시선은예수님의 손가락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손이 아닌

그 손을 펴서 여인에게 손 내밀 수 있는 은혜의 손이 되어야 한다.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요2:24-25)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에 어떤 글을 쓰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엇을 땅에 적었길래 살기가 가득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뒤집어놓았을까?

예수님의 손가락으로 이름만 빼고 내 죄가 적혀지고 있을 때, 죄목을 본 자신의 죄가 부끄러워 돌을 놓지 않았을까?

사람 앞에서는 숨길 수 있다.

세상에서는 숨길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겨서는 안된다. 정직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몰랐으면 하는 치부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8:7-8)

그러한 마음이 올라올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은,

죄지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자

: 죄의 욕망이나 의도가 전혀 없고 실제로 어떤 죄도 짓지 않은 사람

여인을 심판하려면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완전해야 심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은 다른 누군가를 판단하 고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은혜 입은 나 자신인 것이다.

가장 먼저 돌에 맞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 돌은 나를 향해 던졌어야 할 돌이 누군가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보일 때 그것이 어떻게 해결되겠는가?

특히 내 자식에게서 나의 그림자가 보일 때 우리는 견 딜 수 없을 것이다.

돌을 들어 던진다고 해결되겠습니까?

은혜 없이 살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죄인이 있다.

들킨 죄인과 들키지 않은 죄인이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8:9)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하나씩 하나씩 다 도망가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다.

은혜를 받게 되면 은혜를 받고 도망가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께로 나아 오는 사람이 있다.

은혜를 받으면 더 나의 모습이 드러나 게 될까 봐 나를 포장하고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은혜가 있을수록 내가 더 드러나게 될수록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빛 가운데로 나아오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고 은혜 입은 사람이 된다.

나를 정죄하고 판단하던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없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세상에 가장 뛰어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나를 정죄할지라도 나는 더 이상 밑바닥 인생이 아니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8:10)

여자여 하는 말의 표현은 예수님께서 간음하는 여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고 있으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눈은 간음한 비천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뿐인 소중한 자녀로 바라보고 계시고 존귀하게 대해주신다.

사람들 앞에 존귀하게 여김 받으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 발치에 앉아 있을 때 우리에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된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마지막에 여인을 향해 충분히 심판하고 정죄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초점은 심판과 징계가 아닌 항상 은혜와 변화에 있습니다.

자녀에게 징계할 때 심판자로써 너를 심판한다 그런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깨달음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징계를 한다.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다 하셨다.

이로써 이 여인은 구원받게 되었다. 돌에 맞아 심판받아 마땅한 여인이었지만

이로 인해 여인은 육체적으로 구원받았고, 상한 마음과 죽었던 영혼도 살아나게 되고 회복되게 된 것이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정죄하지 않으심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는 공의를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공의가 충족되고 나서야 예수님의 사랑이 오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의 입장은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 이 은혜를 만들기 위해 지불한 댓가가 무엇인가?

은혜를 받는 우리에게는 공짜지만

이 은혜를 내려주시는 하나님께는 철저한 댓가지불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생명을 건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죄를 짓지 마라 내가 너를 위해 죽을거 니까라는 말씀이 생략된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또 그 죄를 지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이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 내가 너를 위해 죽을 테니까)

그것이 안되면 하나님의 마음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없다.

예수님의 핏 값은 값싼 은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간음한 여인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자만이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가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다. 죄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과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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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잔잔/결단고백)시편51편(하나님이시여 나의 모든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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